1
오늘도 어김없이 거리에서는 아우성이 들렸다. 익숙한 노랫말과 지지직거리는 스피커 소리와 함께 맹목적인 대중을 대상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그녀는 나의 손을 붙들고 강렬하게 권했다. “청년 교회 다녀요? 교회 한번 다녀봐요! 나는 전도지를 받아들었다.
그 쪽지 안에는 한 유대인의 죽음에 관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나는 건물 5층의 투석실로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닭장과도 같은 침대들이 나란히 즐비해 있었고 그 중간에 한명 또한 누워서 투석 시술을 받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였다.
나는 간호에 필요한 물품을 들고 들어가 내려놓으며 정리를 하고 있었고, 그는 나를 보며 새삼스레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하려는 일들에 대해서 호방하게 떠들었다. 역시나 광고 연출자답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영화 작품과 미래에 할 일들에 대하여 말했다.
그 중에는 자신이 한 건 하게 되면 건물과 아파트를 매매한다는 둥 말했고 간호사들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말이 무색하게도 얼마 전 그는 중고차 단지에서 사기를 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의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으며 설레발을 쳤지만 온통 거짓말이었다. 분명 시세는 가액 200만원의 차임에도 불구하고 500만원 이상을 지불했던 그였다. 마음과 같지 않은 결과에 또 한번 실망했고 나는 또 다시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잘 안 풀리는 일들의 연속 가운데 공교롭게도 함께 들을 수 있었던 화제는 교회 사역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영화 한 건만 하기만 하면! 교회를 세울 수 있어! 원경아!”
표현 방식에 있어서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생활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종교와 관련해서 어떠한 언급이 있으면 노발대발 화를 냈던 사람이 갑작스레 일년이 되기 전부터 열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무엇인가 약속이라도 한 듯 했다.
그는 그가 요즘 출석하고 있는 작은 교회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 곳에 목사님은 어떤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고, 같이 도와주고 있는 집사님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칭찬했다. 얼마 후, 그는 교회를 위해서 홍보 영상을 제작해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다고 말했고 기대가 되는 듯 격양되어 말했다.
한 가지 진리에 있어서 열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회고해보면 입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건에 대해서 바라보지 못했다. 누군가 말해준대로, 문자 그대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살아왔던 과거와 반대로, 지금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추구하는 ‘영혼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과연 펄떡 뛰는 찬양집회에 출석하는 의미일까, 설교라는 이름의, 여러 미사여구로 이루어진 긴 문장을 청취하면 되는 것일까, 성도 간의 친교를 지속한다면 받을 수 있는 것이 구원일까? 지금 생각해본다면 구원은 개인의 종교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무관하다. 구원 받았다는 삶은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내재화되어 동일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발적인 성도가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2
도스도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 소설 속의 등장 인물들은 나에게 지금까지도 깊은 사고관과 영향력을 준다. 주인공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법학을 전공한 대학생이다.
어느날 술집에서 무명의 두 사람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가난한 민중들의 고혈을 빨아 먹는 전당포 노파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로 죽이는 편이 세상에 이롭다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인자는 단지 몇 명을 죽이고 죄명을 얻었고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본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300만 명이 학살 당했지만 본인은 프랑스의 영웅이라 불리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의 방향을 바꾸듯, 전당포 노파를 죽이는 것이 선이라고 마땅히 라스콜리니코프는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와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소냐, 동생 리자베타의 친구였다. 그녀의 직업은 몸을 파는 창녀였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로 실업자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새어머니로 정신이상자로 힘든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복동생은 헐벗었다. 가족을 자신이 책임지기 위해 그렇게 매춘 생활을 한 것이다. 둘의 관계를 통해 라스콜리니코프는 회개를 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소설은 마친다.
과거에는 나의 삶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사고관이 지배를 하고 있었다. 전복적이고 확실하며 급진적인 것에 대해 열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삶을 살아갈수록 소냐의 삶을 동경하게 된다. 남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영웅이 되기 보다, 자신의 순결을 희생하여 선을 이루길 원했던 소냐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몸을 파는 창녀가 아니라 성인으로 보였다.
3
그렇게 무엇인가 약속이라도 한 듯, 신앙생활을 이어나가던 아버지께서는 교리문답과 세례를 받으시고, 교회의 영상과 책을 만들고 일년 만에 소천하셨다.
의문을 가졌던 영혼 구원의 가치는 아버지를 인생과 관련하고 관지하여 많은 깨달음을 준다. 우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을 30년의 기간,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다. 그렇게 간증하기 위한 충분히 마땅함과 관계 없이 영혼 구원은 이루어졌다. 효과적인 업적, 영향력의 크기나 질은 상관없었다. 자발적인 마음과 행동을 통한 희생의 가치가 하늘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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