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교단체 간사는 나를 일본 순사와 같이 취조하는 말투로 거세게 쏘아댔다. “A 목사를 따를 것이냐, B 간사를 따를 것이냐!“ 중세의 한 신부가 들었던 익숙하고도 기괴한, 기묘한 기시감이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교생활과 대학생활 전반의 기간 동안 봉사했던 선교단체가 있었다. 자신이 하는 활동으로 인하여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일념의 쾌락이 당시의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말의 의심과 선입견 없이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힘껏 뛰어들었다.
청년 멘토 교사, 방송실 엔지니어, 화장실 청소 등 할 수 있는 일을 가리지 않았다. 오직 이웃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과 선배들이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는 환상도 한몫 했다.
나에게 당시의 교회란 세상의 부정과 고통으로부터 온전히 고립된 순정만화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소중했던 시기가 언제였는지 묻는다면 당당히 선교단체를 섬겼던 시기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그럴 수 있었던 충분한 이유는 나에게 당시의 교회란 세상의 부정과 고통으로부터 온전히 고립된 순정만화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유심히 지켜보면 그들의 대화에선 비난과 육두문자는 찾아볼 수 없고 아름다운 모습만 존재했다.
좋은 모습만 기억되는 교회가 나는 무척이나 좋았다. 하지만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그런 그리스도의 공동체엔 인간의 부패 따윈 없을 줄 알았다. 자본, 정치, 거짓 등 이 세상의 논리가 완벽하게 적용되었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이상적 공동체는 이 세상에 없었다.
리더진은 점점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반목하는 자들을 품고 함께할 수 없었다. 동의 못하는 것을 넘어 점차 타자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유는 다양했다. 어떤 이가 ‘교만해졌다는 것, 하나님의 뜻과 멀어졌다는 이유, 은사주의자가 됬다는 소문, 중독자가 됬었다는 거짓말’ 등 사유는 다채로웠다.
리더진에서 나오는 풍문은 정확히 기정 사실이 되어 있었고 공동체는 모두 당사자를 그런 존재로 취급했다. 나는 부득이하게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 그러한 오해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B 간사를 따른다는 말이 사실인가?”
당시의 나는 편의점 매니저 일을 부모님꼐서 건강하실 때 함께 운영하고 있었고 아르바이트 일을 종종 아는 후배들에게 부탁하곤 했다. 또한 그런 오해를 받자, 한 간사는 후배들에게 다가가 당장 일을 그만두라 종용했다. 그런 이후에 3명의 간사가 돌아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B 간사를 따른다는 말이 사실인가?” 나는 당당히 설명했다. “나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고, 특정 목사나 간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모임에 배정되어 어떤 간사에게 배운 이유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수하로 취급되었다.
마지막 통화는 최고참 간사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내게 말했다.“길게 말 안 할 거고 너가 정하도록 해라, A 목사를 따를 것이냐, B 간사를 따를 것이냐.“
나는 침착히 말을 이어나갔다.
“B 간사 또한 신천지로 생각하지 않고, A 목사님 또한 존경합니다. 선배들에게 배운대로 은혜를 주신 분들을 만나지 말라거나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배운 것에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이런 타자화하고 왕따 시키는 일은 초등학생이나 할 짓이고 신천지는 내가 아니라 선배님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있은 후에 그는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다음 주부터는 다른 사람이 너의 조모임을 맡을 것이다.”
긴 시간이 있은 후에 리더의 부정으로 인해 단체는 와해되었다. (좋은 일은 아니기에 자세히 적진 않겠다.) 그렇게 견고했던 종교 단체, 마치 전국 통일한 중국의 나라가 단 한번의 균열로 사방의 지역으로 흩어지듯이 각자가 분열되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는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였다. 각자가 자신의 속한 부서를 찬탈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땅 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 아이의 눈물은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학생이 찾아와 눈물을 흘렸던 인상을 잊을 수 없다. 학교에서 더 이상 기도모임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학생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곤 내 앞에서 펑펑 울었다. 하나님 나라, 타인을 위해 전적으로 애통하는 심정, 필라멘트 전구가 깜빡하며 불타오르듯 잊고 살았던 여러 감정이 살아났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였다. ‘그 아이의 눈물은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비록 작은 고교 기도모임을 위하는 학생의 마음이었지만 실로 내겐 무엇보다도 거대하게 다가왔다.
많은 이들이 동일한 단어, 명제, 문장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아무도 동일한 진리를 믿지 않는다. 마치 중세의 보편 논쟁이 현대에 회귀한 인상을 준다. 과거 교회에서는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이 진행되었다. 실재론은 특정 보편 명제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데아적 존재의 속성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다. 개별자가 보편자의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유명론은 개별자는 개별자일 뿐 특정 보편이라는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단지 말 그대로의 이름, 명칭만 남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절대 보편자가 실재할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교회에서는 진리와 보편에 대해서 매주 설파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도자, 자신조차도 보편자 따위는 실재할 것이라 믿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 지옥, 천사, 은혜, 구원, 원죄 등 거시적 언어는 다방면으로 활용하지만 단지 하늘 위에 둥둥 떠다니는 풍선을 가져오듯, 필요시에 자신이 사용하기 편한 정도로 취하고 버렸다. 사실은 실재적 명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치스럽게도 우리는 매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여전히 우리의 죄악은 지속되고 있고, 슬픈 사실은 정치적, 경제적 도구로 활용하고 또 다시 그가 필요가 없다면 싼 값에 거침없이 팔아버릴 것이다.
어느 날 목사는 선포했다. “갸롯 유다는 불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인간은 아무도 지옥에 당도하지도, 경험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지옥에 갔으리라 함부로 추측하며 단언했다. 문제는 그는 단 한번,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지만 수치스럽게도 우리는 매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여전히 우리의 죄악은 지속되고 있고, 슬픈 사실은 정치적, 경제적 도구로 활용하고 또 다시 그가 필요가 없다면 싼 값에 거침없이 팔아버릴 것이다. 예수, 그의 피흘림은 현대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며 여전히 웃고 있고 유명론적 이해는 건재했다.
그럼에도 기대하는 것은 소수의 신자는 본인의 삶을 실재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살아낸다. 그들의 삶은 종교적 삶을 유지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이 온전한 예배가 된다. 그러한 표현은 생업과 책임을 방치하고 24시간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명칭을 지켜내기 보다 본연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성도, 신자로써 살아낸다.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된다. 책임 맡은 바 청지기로서 삶에서 결과를 내고,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관을 갖고 있으며, 은혜 안에서 주어진 것에서 자족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다.
오로지 종교 단체에 종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또한 아니다. 신앙인이 되기 보다 종교적인 사람이 될 뿐이며 종교 단체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간을 살아왔다. 하지만 명확히 정의한다면 나는 특정 단체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고작 이데올로기로서 그리스도는 그동안 내면에서 작동되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 다른 무명의 다른 교회를 출석했을 때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우리 같은 단체는 없어요!” 라고 선언하는 교인을 보았다. 물론 그 사람에겐 진실의 말일 것이지만, 나는 자연스레 교회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왔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영원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매거진 ‘마지막 겨울’
구독을 눌러주세요
글 최원경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6] "씨팔" (0) | 2023.06.26 |
---|---|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5] 조수, 진동벨, 사요나라 신학교 (0) | 2023.05.31 |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4] 아버지와의 컨택트 (0) | 2023.05.10 |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2] 엄마는 창원에 있었다 (0) | 2023.04.16 |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1] 노교수의 강의는 지루했다 (0) | 2023.04.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