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급하게 창원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5시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나는 운전했다. 창원에 있는 성균관 대학교 삼성병원에서 어머니께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연락을 받고 출발했기 때문에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착했다. 다급하게 복도를 지나쳤고 아버지와 나는 중환자실 앞에 당도했다. 앞에는 넓디 넓은 벤치가 덩그러니 있었고 아버지와 나는 허망하게 앉았다. 그곳엔 우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이 집회가운데 함께 해주실거야, 원경아 믿어보자”
분명 어머니께서는 20kg이 넘는 산소 발생기를 끌고 KTX를 탔고 창원에 내려가셨다. 어떤 은사주의 집회가 그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심술이었는지 어머니의 염원을 들어주지 못했고 오히려 고성방가하며 닥달했다. “엄마는 무슨 이상한 곳에 또 가는거야!”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역사하실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집회가운데 함께 해주실거야, 원경아 믿어보자”라며 아들을 권려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은 대형 집회가 아니었다. 20-30명이 모이는 소규모 집회였음에도 집회 관계자는 최선의 조치로 119를 부른 것 말고는 한 것이 없었다. 후문을 들어보니 주관 목사는 자신의 다음 집회를 진행해야 한다며 모두를 데리고 창원을 떠난지 오래였다.
아침에 면회 시간 만을 기다렸고 이미 그녀는 기도 삽관 시술을 진행한지 오래였다. 호흡기에 강제로 기도에 관을 넣는 시술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손발이 풀려 있다면 환자가 분명 강제로 기도의 관을 뺄 것이기에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진행하였다. 어머니의 사지는 묶여있었고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큰 제한 사항이 되지 못했다. 그녀와 나는 눈으로 모든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많은 부분 상해있었다. 격주로 한번씩 응급실에 실려갔었기 때문에 이미 여러번 주사 바늘로 손목과 발목, 허벅지까지 관통했다. 동맥혈 채혈은 일반적인 정맥 채혈과는 달리 상당한 고통을 수반한다. 왠만한 경력의 간호사들도 묵사발난 팔, 핏줄을 단번에 찾기는 어려웠다. 찌르고 빼고 찌르고 빼고를 반복했다. 그녀의 손목과 발목에 드러난 상흔은 마치 예수의 사지와 다름 없었다.
호흡이 나아진 이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곳들을 전전하였지만 많은 사건들과 함께 고통은 되풀이되었다. 어머니께서 한 날은 서울의 유명한 치유집회에 참석하였다. 200여명의 신도들이 출석하였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뒤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란듯이 집회에 있을수록 호흡은 더욱 가빠졌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곳의 사역자는 나에게 화를 내었고 “다시는 오지 말라”며 강조하고 당부했다.
수원의 한 작은 교회에서는 대뜸 “하나님의 종이라면 우리 교회에서 사역할 찌어다!”라고 선포했고 축사 기도를 진행할 때 쯤엔 멱살을 잡고 기도했다. 정확히 손을 짚은 곳은 목젓이었다. 누구든지 목젓을 잡고 휘두른다면 기침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급소를 눌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사단의 영이 나가는 증거’라고 말했다.
천안에 한 교회의 목사는 인상적인 발언을 나에게 남겼다. 그는 나에게 자신은 무당 안에 있는 귀신을 전문적(?)으로 취급한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필자는 구약학 전공, 종교철학 전공은 들어봤으나 기독교 무당 전공자는 들어보지 못했었다.
하나님 나라, 원죄, 복음, 구원, 은혜 등 원대하고 방대한 단어를 남용하지만 서로 호환될 수 없었다. 아무도 같은 방향을 추구하지 않았다. 본인이 해석하기 편한대로의 신학과 복음, 사역이었다. 타자를 위한 섬김은 부재했고 모두 본인을 위한 사역 뿐이었다. 자신의 단체, 관련된 사무와 연관 없다면 가차없이 절연하고 거절했다. 이러한 본인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방편으로의 복음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했고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방식과 동일했다. 그들에게 메시지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공동체에 주어진 임무가 완수되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해 혈안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같은 문장, 동일한 단어를 사용함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전혀 관계 없는,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자위적 미사어구일 뿐이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아무도 묵언하지 않았고 모두가 발악하며 첨언하였다. 나는 거창한 희생과 투신을 바라지 않았고, 그저 사람답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겐 인간다움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영원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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