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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5] 조수, 진동벨, 사요나라 신학교

by 마지막겨울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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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께서는 나에게 질문했다. 


부친께서는 카메라 뒤에만 붙어있으면 만사형통일 것처럼 호언장담했다. 흐뭇한 표정과 동시에 자식도 자기가 하던 일에 대해서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흘러넘치는 듯 하였다.  7월의 여름, 경기도 외곽, 공장부지와 같은 세트장에서 삼성 갤럭시 광고를 찍었다. 첫 촬영의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일반인이었다면 크게 관심 가지지 않을 한 장면을 위해서 50여명의 스탭들이 일제히 숨죽여 집중하고 있었다.

 

한번을 쉬지 않고 밤새는 과정이었다. 일하는 현장에는 많은 부서가 존재했다. 연출, 촬영, 조명을 비롯하여 아트 미술팀,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모델 에이전시, 동시녹음팀, 로케이션매니저 등등 각자 자기가 맡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촬영현장 ⓒ최원경


숙부께서는 나에게 질문했다. 연출이 하고 싶은지, 촬영이 하고 싶은지, 조명이 하고 싶은지 물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당당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했다. 무엇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을 뿐더러 분별할 수 있는 안목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짧은 영상조차도 연출, 촬영, 조명이 서로의 위치를 존중하고 조율하며 한 가지의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존재했다.


각자 부서의 감독이 있고 그 밑의 조수(助手)의 직책이 존재했다. 첫째, 둘째, 셋째(1st, 2nd, 3rd) 조수의 역할이 있었다. 연출에도 1st 조감독, 2nd 조감독이 있었고, 조명에도 1st, 2nd, 3rd 의 역할이 있었다. 촬영에서 1st 조수의 역할은 사전 촬영의 장비 셋업의 구성을 확인하고 조수 인원을 구성한다. 

 

프로덕션 현장에서는 신(scene)마다 카메라의 노출을 확인하고 의도에 맞는 포커스를 맞춘다. 배우의 미묘한 호흡과 연출자의 의도에 맞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오토(자동) 포커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1st 조수가 상황에 맞게 직접 맞춘다. 어느 장면에서는 앞에 있다가 뒤로 넘어가야 할 필요도 있고, 인물에 맞춰야 하는 부분도, 맞추지 말아야 하는 때도 있다. 


촬영 감독 옆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은 2nd 조수의 역할이다. 화각에 따라 렌즈를 바꿔야 하며 촬영 감독이 요구하는 촬영 기법에 따라 세팅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스탠다드 세팅에서의 빅, 베이비, 하이햇의 높이를 맞출 수 있고 미끄러지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이동 달리를 사용할 수도 있다. 헨드헬드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 숄더 패드를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손으로 잡을 건지, 다른 모비나 RS와 같은 짐벌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뉜다. 장비 전반의 이해를 요구한다. 


3rd 조수는 렌즈를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비싼 렌즈는 한 알에 5000만원 하는 것도 있다. (보통 렌즈 한 세트에 6알 정도 챙겨나간다.) 숙련자가 아닌 사람이 렌즈를 들고 떨어트렸을 경우에 많은 곤란한 상황이 초래된다. 그렇기 때문에 3rd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촬영이 진행되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니터 송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광고 촬영은 광고주, 대행사의 역할이 막대하다. 그들이 돈을 주기 떄문이다. 아무리 잘찍어 봐야 그들의 허락없이는 진행되지 않는다. OK컷이 있다고 해도 선글라스 하나 때문에 다시 찍기도 한다. 



촬영장에는 육두문자가 난무했으며, 신학교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당시 나는 어머니의 몸을 챙기며, 촬영장에서 밤을 세고 있었고, 신학교 또한 다니고 있었다. 지금 회고해 본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 일정을 소화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쉬는 날과 주말에는 어머니와 함께 병원 응급실에 있었고, 촬영장에서는 육두문자가 난무했으며, 신학교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 나는 어느 한 가지를 절실하게 포기하고 싶었다. 가족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천문학적인 병원비를 충당할 방법은 없었기에 돈은 벌어야 했다. 신학 학문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지속되던 어느 날, 나는 학교에 당도했다. 과목에 따른 조별 과제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에는 그 모임의 리더가 있었다. 나를 비롯하여 5-6명의 아이들이 카페에 모였다. 나는 사회에서 하는 것과 같이 동일하게 커피를 사고 진동벨을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진동벨은 울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움직일 마음이 없었다. 5-6명의 인원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고 3초 정도는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곰곰히 자념한 결과, 마음 속엔 진정으로 싫어 하는 심정이 들지 않았다. 나는 벨을 들고 일어나 커피를 받아왔고 각자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형제님^^



리더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다. 특정 멘트를 듣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귀한 섬김 감사드립니다. 형제님^^” 


분명 전도사도 시작하지 않은 학부생이었을텐데 놀라웠다. 그것은 20년 이상 목회한 담임 목사님의 태도였다. 나는 그 안에 누룩을 보았다. 그것을 보며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단번의 태도로 모든 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며 나는 대다수의 신학생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는 많은 회의가 들었고 신학교를 나오는데 가장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은 리더 분도 MK,PK(목회자자녀, 선교사자녀)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하는 것마다 의도치 않게 성도로부터 대접받는 것을 보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런 부분이 사역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 분 말대로 나는 섬김을 하기 위해 학교에 왔지만, 실질적 양태는 섬김을 받기 위해 학교에 머무르는 것만 같았다. 신학교를 타인을 섬기기 위해 갔을 뿐이었지 섬김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세속의 ‘조수’助手(도울조, 손수)가 더욱 섬김에 맞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호히 기숙사 문을 열고 촬영장으로 나왔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영원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매거진 '마지막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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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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