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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거진 "마지막 겨울" lastwi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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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8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8] 영혼 구원,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1 오늘도 어김없이 거리에서는 아우성이 들렸다. 익숙한 노랫말과 지지직거리는 스피커 소리와 함께 맹목적인 대중을 대상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그녀는 나의 손을 붙들고 강렬하게 권했다. “청년 교회 다녀요? 교회 한번 다녀봐요! 나는 전도지를 받아들었다. 그 쪽지 안에는 한 유대인의 죽음에 관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나는 건물 5층의 투석실로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닭장과도 같은 침대들이 나란히 즐비해 있었고 그 중간에 한명 또한 누워서 투석 시술을 받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였다. 나는 간호에 필요한 물품을 들고 들어가 내려놓으며 정리를 하고 있었고, 그는 나를 보며 새삼스레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하려는 일들에 대해서 호방하게 떠들었다. 역시나 광고 연출자답게 .. 2024. 3. 1.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7] 홍콩 7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다.”(홍콩여행기) LIFE 잡지, 종군 기자로의 삶을 살았던 로버트 카파의 명언이다. 그는 스페인 내전, 중일 전쟁, 이스라엘 독립전쟁, 2차 세계 대전 등 여러 전쟁 보도 사진를 주로 찍고 취재를 했던 인물이었다. 대표적인 사진으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다. 이 사진에서 놀라운 지점은 카파 본인은 독일군의 시점에서 피사체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피사체의 대상은 연합군이다. 분명 연합군과 같은 배를 타고 노르망디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더 나아가 고지에서 연합군의 모습을 프레임 안에 담았다. 카파의 사진은 정지해 있지만 역동하며 화약 냄새가 진동한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2019년 12월, 나는 즉.. 2023. 7. 23.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6] "씨팔" “씨팔, 모니터가 왜 안나와 최원경!”, 선배는 나에게 거세게 외쳐댔다. “지금 바로 해결해놓겠습니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촬영 현장은 50여명의 스태프들이 함께 했지만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필요로 하는 부분에 맞춰지는 하나의 퍼즐 조각처럼 한 사람의 역할은 중요했다. 막내일지 모르지만 그런 나도 분명히 있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렌즈 운반과 모니터 송출, 하루에도 수십번 이름이 불렸다.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혼났지만 나는 조수로서의 삶이 좋았다. 마치 한가지 움직임에 대해서 갈고 닦는 운동선수 마냥,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에 쾌감이 있었다. 촬영팀으로서 갖춰야하는 덕목 중에 하나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현.. 2023. 6. 26.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5] 조수, 진동벨, 사요나라 신학교 이메일 구독하기 숙부께서는 나에게 질문했다. 부친께서는 카메라 뒤에만 붙어있으면 만사형통일 것처럼 호언장담했다. 흐뭇한 표정과 동시에 자식도 자기가 하던 일에 대해서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흘러넘치는 듯 하였다. 7월의 여름, 경기도 외곽, 공장부지와 같은 세트장에서 삼성 갤럭시 광고를 찍었다. 첫 촬영의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일반인이었다면 크게 관심 가지지 않을 한 장면을 위해서 50여명의 스탭들이 일제히 숨죽여 집중하고 있었다. 한번을 쉬지 않고 밤새는 과정이었다. 일하는 현장에는 많은 부서가 존재했다. 연출, 촬영, 조명을 비롯하여 아트 미술팀,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모델 에이전시, 동시녹음팀, 로케이션매니저 등등 각자 자기가 맡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숙부.. 2023. 5. 31.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4] 아버지와의 컨택트 그는 임권택 영화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재직하고 광고 연출 감독이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콩국수를 즐겨 먹었다. 남대문 삼성본관의 뒷골목에는 진주회관이 있었고 아버지는 항상 그 콩국수를 좋아했다. 그 외에도 지역마다 갖고 있는 맛집 리스트가 있었는데 가령 신사동엔 영동설렁탕, 학동엔 평양면옥, 명동엔 하동관, 이남장이 있었다. 말고도 여럿이 있었는데 내가 자란 이후에야 그 출처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광고 연출자라는 본인에 업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임권택 영화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재직하고 광고 연출 감독이 되었다. 한 지점으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직업이 아니고 매순간 뛰어다니는 귀뚜라미와 같이 항시 역마살이 깃들어 있는 삶이었다. 깊은 동굴에서 두꺼운 석순이 쌓아 오르듯, 아버지가 알고 있는 맛.. 2023. 5. 10.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3] 불지옥가는 가룟 유다 한 선교단체 간사는 나를 일본 순사와 같이 취조하는 말투로 거세게 쏘아댔다. “A 목사를 따를 것이냐, B 간사를 따를 것이냐!“ 중세의 한 신부가 들었던 익숙하고도 기괴한, 기묘한 기시감이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교생활과 대학생활 전반의 기간 동안 봉사했던 선교단체가 있었다. 자신이 하는 활동으로 인하여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일념의 쾌락이 당시의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말의 의심과 선입견 없이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힘껏 뛰어들었다. 청년 멘토 교사, 방송실 엔지니어, 화장실 청소 등 할 수 있는 일을 가리지 않았다. 오직 이웃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과 선배들이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전진.. 2023. 5. 6.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2] 엄마는 창원에 있었다 우리는 다급하게 창원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5시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나는 운전했다. 창원에 있는 성균관 대학교 삼성병원에서 어머니께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연락을 받고 출발했기 때문에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착했다. 다급하게 복도를 지나쳤고 아버지와 나는 중환자실 앞에 당도했다. 앞에는 넓디 넓은 벤치가 덩그러니 있었고 아버지와 나는 허망하게 앉았다. 그곳엔 우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이 집회가운데 함께 해주실거야, 원경아 믿어보자” 분명 어머니께서는 20kg이 넘는 산소 발생기를 끌고 KTX를 탔고 창원에 내려가셨다. 어떤 은사주의 집회가 그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심술이었는지 어머니의 염원을 들어주.. 2023. 4. 16.
[최원경의 신앙인의 초상 1] 노교수의 강의는 지루했다 노 교수의 강의는 여전히 지루했다. 수업이 끝나갈 때쯤 교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은 여기까지고 책을 저렴하게 구하고 싶은 사람은 말하세요. 정가에서 10% 저렴한 가격에 줄거니까…” 몇몇 교수는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신학생으로서 익혀두어야 할 책을 구해오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신의 저서를 팔기에 바빴고, 오늘의 교수도 그와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난 뒤, 신학교의 하늘은 푸르렀다. 나무들은 울창했고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은 나로 하여금 가슴 뛰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지나간 자리, 시간을 머금은 듯한 따뜻한 인상을 주었다. 다른 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어머니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조금이나..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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