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은 우리사회에서 오랫동안 도덕적인 문제 혹은 윤리적인 문제로 취급되어왔다. 누구든지 중독을 모르는 채로 어떤 사람이 무언가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여 일상생활의 문제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속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 사람을 두고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게으른 사람’ 혹은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 사람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가족이나 지인이 해결해준다면, 그리고 이러한 일이 반복된다면 본인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한심한 사람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물론 최근에는 뉴스나 기사를 통해 중독성 약물이 우리가 자연적으로 느낄 수 있는 쾌락과 비교할 때 얼마나 더 강력한지, 그리고 이를 경험하게 되면 어떠한 느낌을 받고 이를 끊으려 할 때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떠한 고통이 따르는 지 알려지고 있고, 일련의 연구를 통해 중독이라는 질병의 증상 자체가 의지가 부족하거나 책임감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중독을 떠올릴 때 개인의 의지와 도덕성을 함께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마약보다는 술과 담배에서, 그리고 술과 담배보다는 SNS나 음식같이 접하기 쉬울수록 더 그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아마도 이는 해봤기 때문에, 그리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중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질병보다는 개인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중독의 시작을 중독성 약물 혹은 중독적 행동을 경험한 시점이 아닌, 그 사람의 과거 시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중독에 있어서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요인을 원가족과의 경험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과거부터 이어져왔다. 이미 ‘중독성 사고’에서 데이비드 세들럭 박사(David Sedlak)는 개인이 경험한 부모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느끼는 부적합하다는 느낌이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을 변화시키는 약물을 사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중독자 부모가 자녀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는 클라우디아 블랙의 저서 ‘상속을 거부하는 아이들’을 통해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이러한 시도는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중독 및 자살, 우울처럼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연구자들은 아동기 역경경험(Adverse Childhood Experience:ACE)에 주목하고 있다. 아동기 역경경험(ACE)이란 ‘불우한 아동기 경험’ 혹은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으로 불리기도 하며 18세 이전에 개인이 경험한 학대와 가족기능 장애에 대한 노출로 발생하는 ‘외상적 경험(트라우마)’들을 의미한다.
아동기 역경경험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1998년 미국의 의사인 Felitti와 그의 동료들이 Kaiser Permanente의 Health Plan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였다. 1985년 Vincent Felitti 박사는 건강 개선을 위한 비만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를 운영하는 도중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비만클리닉의 50%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중이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만클리닉을 그만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만클리닉의 목표인 체중감소 효과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이를 그만둔다는 사실은 의아한 일이었고 이에 대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Felitti 박사는 자신의 환자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Felitti 박사는 자신의 환자 286명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시절 성 학대 및 신체적 학대를 경험했으며 과식 및 폭식이 이들에게 불안, 두려움, 분노, 우울 등의 부정적인 정서를 완화하는 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러한 임상적 결과는 아동기 역경경험이 성인의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연구의 토대가 되었고 미국의 질병통제센터(Center of Disease Control) 연구진과 함께 Kaiser Permanente의 Health Plan 가입자 17,421명을 대상으로 성적, 언어적, 신체적 학대의 세 가지 유형과 부모의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질환, 가정폭력 목격, 가족의 수감, 이혼 및 유기의 다섯 가지 유형을 포함한 8개의 유형으로 구성된 아동기 역경경험이 성인기 이후 이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연구결과, 응답자 절반 이상(52.1%)이 한 가지 이상 아동기 역경경험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아동기 역경경험이 특정한 일부 사람들의 경험이 아닌 사람들의 보편적인 한 경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연구에서 역경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응답자는 대부분 다른 범주의 역경을 함께 경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네 가지 이상의 아동기 역경경험에 노출된 사람들인데, 이들은 아동기 역경경험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알코올 중독을 경험할 확률이 7배 높았고, 약물을 사용할 확률이 10배 높았으며, 자해 및 자살 시도를 할 확률이 12배가량 높았다.
아동기 역경경험의 연구를 통해 만 18세 이전의 경험이 성인기 이후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점차 전국적으로 연구가 확대되었고 캐나다, 사우디아라비아, 필리핀, 중국 등에서 이루어진 연구에서도 Felitti 박사의 연구결과를 지지하면서 아동기 역경경험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아동기의 경험은 아동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성인기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심지어는 사회적 성취, 성(性)적 행동, 범죄 경향성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의 삶 전체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아동기 역경경험과 관련한 일련의 연구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Felitti 박사의 연구결과를 지지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성인 1,037명을 대상으로 한 민윤영(2018)의 연구에서 88.7%의 응답자는 하나 이상의 역경경험을 경험했다고 보고했는데, Felitti 박사가 아동기 역경경험에 대해 과소추정 될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듯 우리가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를 꺼내 놓기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수치는 매우 높은 수치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아동기 역경경험은 개인의 어린시절 외상(트라우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중독에 과거 시점부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독은 중독성 약물 혹은 행동을 시작한 시점이 아닌 그 이전의 사건이 중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동기 역경경험을 포함한 일련의 트라우마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중독과 연결이 되는 것이며,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는 신체에 어떻게 저장되고 중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다음 호에서 계속)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영원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매거진 '마지막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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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라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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